170804 토론회 발표: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 도망가지 않고 마주하기

행사명: 여성주의 라운드 테이블 
일시: 8월 4일 (금) 19:00
장소: 종로구 자하문로 106 갤러리 류가헌
광장의 여성들 / 여성들이 기억하는 광장 (1987-2017) 세대 간 대화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 도망가지 않고 마주하기>
1. 광장의 페미니스트
이번 토론회의 제목은 “광장의 여성들”입니다. 마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도 같은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만. 곧 그렇게 한 쪽 가슴을 드러낸 모습이 아니면 우리는 광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광장에서 여성은 아름다운 진보의 기수이거나, 숭고한 어머니거나, 기특한 소녀로 존재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는 그 어떤 모습에도 들어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 광장에서 페미니스트는 그동안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동력이라고 여겨진 “민주시민”을 비판하였습니다. 물론 광장의 페미니스트도 그 “민주시민”의 일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탄핵에 성공하였을 때에는 누구보다 기뻐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탄핵 당일 광장에서조차 우리는 꺼림칙한 세력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 앞에서 “미스코리아들이다”라고 말하는 아저씨들과 싸우고 소리쳐 “분란”을 일으켰으니까요. 축하의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불평하고 소리치는 불화의 여신과도 같은 페미니스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2016년 촛불 정국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그것은 2017년 여름에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발표를 해 달라고 요청받은 이후에 저는 지난 겨울 광장의 페미존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여기 참석하신 분들은 아마 지난 2016년 박근혜 퇴진집회의 페미존을 처음 들어보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페미존은 부패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혐오발언, 혐오문구. 폭언, 불쾌한 신체접촉 없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여러 페미니스트 단체가 모인 자리였습니다. 사전집회로 시작해 같이 행진하고, 마무리집회를 하고 헤어지는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작년 겨울, 저 스스로는 페미존이 작게나마 “피해자 프레임 벗어나기”를 실천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페미존은 굉장히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이유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힘이 약하고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니 모여서 스스로를 지키자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훗날 페미존은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주체로 바뀌었습니다. 촛불집회 전체 무대에서 혐오발언을 하지 못하게 막거나, 여성혐오성 노래를 부르겠다는 가수의 공연을 취소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 정도가 제가 작년 겨울 광장에 선 페미니스트로서 생각했던 점입니다. 그 후에 시간이 꽤 지났고, 광장에 대하여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생각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촛불소녀와 헬페미
우리는 고마워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치 2016년 페미존이 과거에 없다 갑자기 튀어나온 산물인양 뽐냈는데요. 사실 2016년 페미존은 늘 광장에서 싸워온 여성들의 노력을 기반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광장에는 당연히 우리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거든요. 페미존은 “우리의 것이 아닌 광장을 되찾자!”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광장은 원래 우리의 것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아니더라”라는 당황스러움에 기반한 모임이었습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용기를 내기는 쉽습니다. 나의 것을 되찾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지니까요.
저는 91년생으로 2008년에 “촛불소녀”였습니다. 교복 치마를 입고 시위에 나갔고, 평화시위가 익숙한 사람이었어요. 80년대 (남)학생과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시위 세력은 2000년대 “촛불소녀”나 “유모차 부대”처럼 여성 친화적(?)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물론 시위 현장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여전히 “온화한 조력자”와 같은 역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무리 평화시위라고 한들 밧줄을 당기고 버스를 무너트리는 같은 시위 현장에서 우리는 “여성분들은 뒤로 빠지세요”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 성격이 얼마나 시혜적이고 가부장적이든, 어쨌든 “촛불소녀”라고 광장의 여성이 이름 붙여진 것은 청소년 당사자에게 긍정적인 경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 자신이 광장의 일원으로 호명된 경험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물론 그 때는 “소녀가 뭐야 소녀가”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만, 그래도 광장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게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촛불소녀”라는 이름을 붙였던 진보 아재들은 그 소녀들이 페미존의 헬페미가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이는 상당히 통쾌한 서사라고 생각합니다.
3.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
제 경우에, “소녀”라고 불리든 성추행의 위협을 직면하든 광장에 나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고등학생 때나 성인이 된 이후에나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작년에는 이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여성혐오와 폭력이 가득한 광장에 나가는 것은 그런 혐오세력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광장에 나가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글이 sns상에서 호응을 얻었던 현상을 기억합니다. 저는 이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사고의 기본은 피아구분을 하는 것이니까요. 문재인 정부 이후에 소수자가 받는 대우가 얼마나 나아졌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 도와줘봤자 아무 소용없고 이용만 당한다”는 주장을 편 사람들이 “거봐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에나 지금에나 맞서 싸우기를 고집하였습니다. 제2차 페미존에서 내세운 문구는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입니다. 이 말은 제1차 페미존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문장인데요. 광화문 광장에서 "학생들은 집에 들어가라"는 훈수를 듣고 확성기를 잡은 친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저씨나 집에 가세요.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 뒤에서 행진하던 모두가 따라했고, 그때부터 이는 페미존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혐오세력을 향한 외침으로서 탄생하였습니다만, 그 후 우리가 광장에 나가는 명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폭력과 혐오가 가득찬 광장에서 도망치지도 “전략적 후퇴”하지도 않고 마주하며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공적이었을까요? 페미니스트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아가며 광장에서 싸운 결과로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요. 결국 탄핵이 성공하였으니 가시적인 성과는 얻었습니다. 페미니스트 세력도 정권 교체에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이요. 또한 앞서 말했듯 광장에서의 시위 문화를 바꾸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2015년 메갈리아 이후 시작된 페미니스트 리부트의 흐름 안에서 2017년의 광장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까요. 우리는 광장에서 “페미니스트 정치 세력화”에 성공하였다고 자평할 수 있을까요?
4. 페미니스트 정치 세력화
“민주시민”은 광장에서 정치 세력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들어섰고, 지지자들은 그를 “촛불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개혁정부를 표방하는 이번 정권이 들어서고 페미니스트는 “그동안 뭐 하다가 와서 이제 훼방을 놓냐”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박근혜가 퇴진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만만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니 여러모로 땡깡을 피우고 다 된 밥에 초를 친다는 공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명박근혜 때에도, 사실 그 전 노무현 때에도, 그 훨씬 전부터 꾸준히 세상과 싸워 왔습니다. 그렇기에 정권을 잡은 “진보시민”들이 너희는 그동안 어디에 있다가 이제 와서 시비냐고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당황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 있는 척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는 왜 이렇게 많은 오해를 살까요? 이전까지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특정 세력은 반대편 세력을 이기려고 하지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보와 보수, 노동자와 사용자 등은 대립항입니다. 그들은 서로 맞서 싸우며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상대를 개혁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페미니스트는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고 소 등을 치는 등에처럼 귀찮게 굴며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입니다. 광장을 차지한 기존 세력은 이러한 공격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오랫동안 무시하려고 노력해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들은 페미니스트가 원하는 세상이 상당히 귀찮다는 점을 쉽게 간파해냅니다.
진보세력에서 정한 이분법적 선악구도—지난 박근혜 정부에 있어서는 태극기부대와 촛불시민—로 정치 지형을 파악하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스트의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특정 세력의 편이 되기를 거부하고, 세상 어디에나 있는 불평등과 억압을 지적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굉장히 멋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내 편 네 편이 없다는 것은 훌륭한 사상이나 사회 운동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현실 정치에 적합한 태도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지난 촛불혁명 시기에 너나할 것 없이 시비를 걸고 싸워서 그 역할을 보여준 페미니스트 세력이 어떻게 “정치 세력화”를 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세력화”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우리는 등에나 게릴라가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단단한 조직으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개인을 조직화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페미니스트다운 것일까요? 페미니스트가 광장에서 낸 목소리로써 권력을 얻어 기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을 포기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2017년 여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