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02 "신여성과 만나다" 토크 콘서트 발표: 나혜석처럼 죽지 않기
<신여성과 만나다> 토크 퍼포먼스에 초청받아 나눈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신여성의 불행과 페미니스트의 행복, 미투운동에 대한 생각을 말했습니다.
날짜: 2018년 3월 2일 금요일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안녕하세요. 페미니스트 활동 모임 페미당당의 심미섭입니다.
저는 2년 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스트로서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그때부터 종종 이 운동 혹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듣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야기했습니다. 행복한 페미니스트로 살다가 죽는 것이라고요.
사실 정확하게는 "나혜석처럼 죽지 않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나혜석은 불운한 말년과 비극적인 죽음으로 유명하지요. 페미니스트로 살면서도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미쳐서" 죽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신여성 도착하다>를 관람할 때도 나혜석을 포함한 다섯 신여성의 삶이 전시된 마지막 전시관을 가장 유심히 구경하였습니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전시관 안에 들어서자 괜히 숙연해진 기분이었습니다. 전시장에는 그 다섯 신여성이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역시나 나혜석의 쓸쓸한 죽음에 대해서도 기술되어 있었지요.
활동가이다 보니 여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을 한 주세죽의 삶에 대한 설명을 관심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그분도 역시 카자흐스탄으로 망명을 가서 홀로 죽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여성의 삶을 현대 작가가 재해석한 작품을 통해서는 주세죽이 망명한 땅의 황량하고 우울한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고요.
다소 시무룩해졌습니다. 주세죽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에 그 이름을 쳐봤더니 나오는 글 제목이 이렇더라고요. "비운의 여성운동가 주세죽". 글에서는 이 "여성"운동가가 어떻게 남편도 잃고 아이하고도 떨어져 혼자 쓸쓸하게 살다가 죽었는지가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저희 어머니와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세죽이라는 신여성 운동가가 있었는데 삶이 되게 슬펐다고요. 그런데 그에 대해 찾아보신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첫째 남편 사라지자 다른 남자랑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주독립적으로 씩씩하게 살았구먼 뭘. 나보다 잘 살았구먼. 별소릴 다 하네. 참 내."
어머니는 주세죽의 일생을 "훌륭한 삶이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본군 생체실험에 동원되어 죽은 윤동주나 암살당한 김구를 떠올릴 때 비극적인 죽음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죽었는지보다는 사는 동안 어떤 훌륭한 일을 했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은 여전히 비극적이고 슬픈 이미지에 갇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신여성 중에 본받고 싶은 롤모델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요.
차별적인 시대에 마음껏 활개를 못 편 그들의 일생 자체에 한계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여성의 삶을 불행 서사로 읽어내고자 하는 욕망 혹은 해묵은 고정관념 탓일 수도 있겠습니다.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에는 신여성에 대해 당시 사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 여럿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중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많은 소설과 영화가 배드 엔딩으로 끝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전시장에서 본 한 영화는 화려하게 꾸미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유연애를 즐기던 여성 주인공이 결국 애인에게 버림받고 불행해진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처럼 제멋대로 사는 여자는 결국 행복해질 수 없다는 여성혐오적 서사구조를 이미 체화해버렸을까요. 그래서 전시에 등장한 신여성 5인의 삶도 비극적으로 읽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는 페미니스트로서 삶의 목표를 좀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혼자 조용하게 행복해봤자 나중에는 또 사회에 저항하다 불행하게 죽은 여성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인데요.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가짐에서 한 발 더 나가 이 행복함을 과시하고 전시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행사장에서 이런 얘기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나니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습니다. 미투 운동이 한참 진행중인 지금 행복을 말하는 것이 부적절하고 한가한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 고발의 연속을 사회적인 현상으로 보지만 저에게는 우리 한 명 한 명의 슬픔으로 느껴집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겪은 폭력이 문득문득 떠올라 힘들기도 합니다. 아마 여기 앉아계신 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를 비롯한 많은 이삼십대 친구들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서 정체화하였거나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요즘 다시 생각합니다. 추모라는 감정으로 모인 우리는 눈물과 분노로써 연대하였습니다. 죽음으로 시작한 그 사건 이후 강남역에 붙은 포스트잇을 기억합니다. 수많은 여성이 빙 둘러서서 자신이 당한 혐오와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 자유발언대도요.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우리는 돌이킬 수 없게 변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멀어지고 속해있던 사회에서 배제되고 트라우마에 괴로워하기도 하였지만 더욱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운동도 언젠가는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백 년 전 신여성 이야기를 지금 이렇게 하듯이 백 년 후에는 2018년의 페미니스트를 회고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릴 수도 있겠지요? 그 전시가 총천연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여자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멋있고 당당하게 살았는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눈물 흘리며 싸웠고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을 힘을 다해 행복했다고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미래에 태어난 어떤 여성은 "나혜석처럼 죽지 않기"가 아니라 "2018년의 페미니스트처럼 살기"를 인생 목표로 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