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05 편지: A 선생님께
A 선생님께
쉬는 시간이 끝났는데 얘가 안 돌아오고 어디 갔나 하시겠지요. 다시 강의실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 근처 아무데나 앉아서 당황하다가 울다가 화내다가 이 메일을 씁니다.
최근 제 친구인 지안이가 서울대저널에 서울대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글을 썼는데요. 이 글을 읽고 나서 제가 학부때부터 당했던 여러 성폭력에 대한 기억이 한 번에 쫙 펼쳐지면서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고 있습니다.
기억에 크게 남아있는 경험 중 하나는 학부 시절 B 선생님 수업을 들을 때였는데요. B 선생님 수업도 여학생으로서 듣기에 좀 힘든 면이 있긴 하지만. 그땐 뭣모르고 어떻게 저떻게 참고 들었고... 사실 큰 사건은 학기가 끝날 때쯤 강의실 밖에서 있었습니다.
친구중에 한 명이 너 혹시 철학과 대학원생 C 아냐고 하더라고요. 얼마전 그 사람이랑 우연히 술을 같이 먹게 되었다고요. C는 자신이 성구매한 얘기를 자랑처럼 쭉 늘어놓다가 혹시 너 심미섭 친구냐고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불러다가 같이 술을 먹자고 했다고요. 청강 들어간 학부 수업에 심미섭이 있었는데 가슴이 크고 어쩌고 저쩌고. 대상화와 성희롱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 C 씨와 같은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학부생은 보통 청강하는 대학원생에게 관심이 없지요) 한 학기 내내 나는 큰 가슴으로 인지되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가슴 달고 인문대 복도 걸을 때마다 불안하였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은 성범죄자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그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이고 제 귀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저에게 혹은 제 친구에게 직간접적으로 가해한 사람은 철학과 대학원 구성원의 절반을 넘고. 저는 때로는 체념하고 때로는 도망다니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네요.
C 씨가 한 말을 전해들은 일은 벌써 3년? 4년?은 된 기억이니 희미해져가고 있었는데요. 지난주 월요일에 지안의 글을 읽자마자 든 생각이 "곧 D(강독 문헌) 읽으러 들어가도 거기 성범죄자가 앉아 있네"였습니다.
사실 그 전에도 웃기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성범죄자(들)와 함께 철학을 논한다는 것이요. 하지만 저 글을 읽고 기억을 생생하게 꺼낸 후에는 단순히 웃기다는 생각을 넘어서 강의실이 안전한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은 저에게 신체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방금 수업을 듣다가 잠시 나가서 숨을 몰아쉬고 들어갔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기숙사에 가서 끊었던 불안약을 다시 챙겨먹었습니다. 지금은 급하게 근처 정신과에 전화해서 내일 아침 9시에 진료 예약을 잡았습니다.
나는 그냥 수업 듣기 싫어서 뛰쳐나온 미친년이 아닐까. 그냥 나온 건데 나온 변명을 꾸며내기 위해 어떤 대단한 이유를 구구절절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이미 엄청나게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께 이 메일은 왜 쓰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저는 선생님이 안전한 사람인지 아닌지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수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서울대에서 수업을 하실 것이겠지요. 학교라는 공간을 안전하게 만들 책임은 저보다는 선생님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생님이 D를 가르치고 있는 강의실에서 학생 한 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메일을 씁니다.
C 씨를 강의실에서 내쫓아 달라거나 하는 요청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왜 그런 요청을 하지 않을까요? "여기가 미국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요청일텐데 말입니다.) 적어도 선생님께서도 조금이나마 같이 당황하고 괴로워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학교에 어떤 변화의 계기가 오고 선생님이 그에 힘을 실을 수 있을 때, 오늘의 저를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어 이 메일을 보냅니다.
그럼 저는 다시 강의실로 들어가겠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심미섭 드림
쉬는 시간이 끝났는데 얘가 안 돌아오고 어디 갔나 하시겠지요. 다시 강의실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 근처 아무데나 앉아서 당황하다가 울다가 화내다가 이 메일을 씁니다.
최근 제 친구인 지안이가 서울대저널에 서울대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글을 썼는데요. 이 글을 읽고 나서 제가 학부때부터 당했던 여러 성폭력에 대한 기억이 한 번에 쫙 펼쳐지면서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고 있습니다.
기억에 크게 남아있는 경험 중 하나는 학부 시절 B 선생님 수업을 들을 때였는데요. B 선생님 수업도 여학생으로서 듣기에 좀 힘든 면이 있긴 하지만. 그땐 뭣모르고 어떻게 저떻게 참고 들었고... 사실 큰 사건은 학기가 끝날 때쯤 강의실 밖에서 있었습니다.
친구중에 한 명이 너 혹시 철학과 대학원생 C 아냐고 하더라고요. 얼마전 그 사람이랑 우연히 술을 같이 먹게 되었다고요. C는 자신이 성구매한 얘기를 자랑처럼 쭉 늘어놓다가 혹시 너 심미섭 친구냐고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불러다가 같이 술을 먹자고 했다고요. 청강 들어간 학부 수업에 심미섭이 있었는데 가슴이 크고 어쩌고 저쩌고. 대상화와 성희롱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 C 씨와 같은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학부생은 보통 청강하는 대학원생에게 관심이 없지요) 한 학기 내내 나는 큰 가슴으로 인지되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가슴 달고 인문대 복도 걸을 때마다 불안하였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은 성범죄자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그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이고 제 귀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저에게 혹은 제 친구에게 직간접적으로 가해한 사람은 철학과 대학원 구성원의 절반을 넘고. 저는 때로는 체념하고 때로는 도망다니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네요.
C 씨가 한 말을 전해들은 일은 벌써 3년? 4년?은 된 기억이니 희미해져가고 있었는데요. 지난주 월요일에 지안의 글을 읽자마자 든 생각이 "곧 D(강독 문헌) 읽으러 들어가도 거기 성범죄자가 앉아 있네"였습니다.
사실 그 전에도 웃기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성범죄자(들)와 함께 철학을 논한다는 것이요. 하지만 저 글을 읽고 기억을 생생하게 꺼낸 후에는 단순히 웃기다는 생각을 넘어서 강의실이 안전한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은 저에게 신체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방금 수업을 듣다가 잠시 나가서 숨을 몰아쉬고 들어갔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기숙사에 가서 끊었던 불안약을 다시 챙겨먹었습니다. 지금은 급하게 근처 정신과에 전화해서 내일 아침 9시에 진료 예약을 잡았습니다.
나는 그냥 수업 듣기 싫어서 뛰쳐나온 미친년이 아닐까. 그냥 나온 건데 나온 변명을 꾸며내기 위해 어떤 대단한 이유를 구구절절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이미 엄청나게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께 이 메일은 왜 쓰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저는 선생님이 안전한 사람인지 아닌지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수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서울대에서 수업을 하실 것이겠지요. 학교라는 공간을 안전하게 만들 책임은 저보다는 선생님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생님이 D를 가르치고 있는 강의실에서 학생 한 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메일을 씁니다.
C 씨를 강의실에서 내쫓아 달라거나 하는 요청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왜 그런 요청을 하지 않을까요? "여기가 미국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요청일텐데 말입니다.) 적어도 선생님께서도 조금이나마 같이 당황하고 괴로워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학교에 어떤 변화의 계기가 오고 선생님이 그에 힘을 실을 수 있을 때, 오늘의 저를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어 이 메일을 보냅니다.
그럼 저는 다시 강의실로 들어가겠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심미섭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