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6 "타락천사 L'ange Noir" 전시 서문: 여자들의 혀만 남았다

 여자들의 혀만 남았다 

"타락천사 L'ange Noir" 전시에 부쳐


기독교 전통 중에는 혀를 내밀어 포도주에 적신 빵을 받아먹는 의식이 있다. 신도의 몸에 성체를 영하기 위해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신과 함께하기 위해서, 우선 그의 육체를 맛보다니.

한편, 중세 유럽에서 말로 저지를 수 있는 죄악, 즉 혀의 범죄들(les péchés de la langue) 중 가장 극악한 것은 신성모독이었다. 12세기 후반부터 기독교 미술에서 혀는 언어적인 일탈을 나타내는 도상 요소로 강조되기 시작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는 루시퍼와 같은 타락천사를 그려낼 때 혀를 강조한 이미지를 빈번하게 찾을 수 있다. (이혜민, 2011, '중세의 언어폭력으로서의 신성모독', 서양중세사연구 28.)

혀는 제일 먼저 신에게 가닿는 신체 부위이면서, 그를 모욕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정두리와 조은후의 전시 "타락천사"에 대한 비평을 부탁받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사실 당황했다. 작가들이 작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작품보다 그에 담을 메시지가 먼저 완성되기도 했다. 이 전시는 그야말로 세상에 "소리치는" 모습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예술가 스스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나 풍부한데, 비평가는 무슨 설명을 더 할 수 있을까? 부담스러움에 말을 아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막상 전시를 보고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오히려 그들의 혀에 대해 더욱더 적극적으로 첨언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에 여성의 예술은, 특히 여성 퀴어-페미니스트의 예술은 굳이 투박하게 사회적 맥락을 나타내지 않더라도 "소리치는"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작업 과정부터 이미 작가가 투쟁하는 삶을 담은 서사의 연속일 뿐 아니라,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난 이후에도 관객은 이에 대해 유독 많은 말을 얹으며 이해와 오해를 쌓아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 정두리의 콜라주 연작은 기성 잡지 혹은 포르노 등에서 재현된 이미지와 작가 본인이 직접 찍거나 연출한 사진 작업을 출처 없이 뒤섞은 작품이다. 정두리가 직접 제작한 도색 잡지인 "젖은 잡지"에 등장하는 화보를 차용하기도 했다. "젖은 잡지"는 때때로 흔한 외설과 다름없는 매체로 취급되며 여성 혐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중은 남성을 위해 출간되는 포르노와 "젖은 잡지"의 차이가 무엇인지, 착취적인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여성의 신체와 정두리가 직접 찍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 점에서 다른지 끊임없이 물었다. 정두리는 콜라주라는 작업 방식을 통해 여러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혼재함으로써 이런 논란을 더욱 가중하려는 듯이 보인다. 겹겹이 쌓인 말을 풀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혀를 얽어내는 선택을 한 것이다.

여성 신체를 그려내는 회화 작업을 계속해온 조은후는 새로운 연작을 통해 여성 전용 섹스토이샵이자 카페/바인 푸시베리에 있는 인물을 재현한다. 등장인물은 원하는 만큼 자신을 뽐내고 있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인물 스스로 꾸민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즉, 조은후의 작품은 인물의 초상이되, 자신이 누군가의 모델이 된다는 긴장을 내려놓은 여성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를 두고 "남성의 시선"을 운운하는 평은 다소 게으르다. 조은후가 만들어낸 세계는 억압을 애써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소중하기 때문이다. 가장 치명적인 신성 모독은 그의 존재 여부를 의식하지도 않는 시공간을 꾸려내는 것이 아닐까? 조은후의 그림 속 여성들은 이미 꿈꾸는 세계가 온 것처럼 웃고 떠든다. 그렇기에 이들은 그 무엇보다 파괴적인 존재가 된다. 

이렇게 "소리치는" 두 작가의 작품은 푸시베리라는 공간에 위치함으로써 그 의미를 완성 짓는다. 흰 벽을 배경으로 한 전시장에서 이를 보았다면 관객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오히려 별 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홍색 벨벳과 섹스토이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 걸린 액자들은 더더욱 많은 말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푸시베리는 원래도 초인종을 눌러야만 입장할 수 있는 가게였지만, 전시 기간에는 예약을 통해 소수의 관객만이 출입할 수 있다. 전시물을 모시는 성전에 비견할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이렇게 입장한 푸시베리는 작가와 단골들에게는 일상적인 공간이겠지만, 용기내 찾아온 누군가에게는 일탈의 현장이겠다. 빵과 술을 먹고 마시며 살과 피에 대해 말하는, 가장 순수할 수도 가장 불경할 수도 있는 이곳에서, 이제 작품을 마주한 당신들의 혀만 남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글: 심미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