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14 "페미당당 아카이브 프로젝트" 전시 서문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페미당당 아카이브 프로젝트

2021년 8월 14일부터 29일까지

탈영역우정국 2층



서문


페미당당은 2016년 도래한 페미니즘 리부트의 흐름을 타고 여성혐오 규탄, 낙태죄 폐지, 성폭력 고발 등을 통한 사회변화에 앞장서 왔다. 페미당당의 첫 번째 활동인 “거울행동”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에 대응하는 시위이자 퍼포먼스로서, 예술의 방법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한 기획이었다. 그 후 페미당당은 시위, 기자회견, 인터뷰, 세미나 등 기존 사회운동의 문법에 디자인, 퍼포먼스, 설치, 영상 등의 기법을 병행 혹은 융합하며 활동을 지속했다.

사회운동과 예술활동은 스스로가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에 잘 남지 않는다. 페미니즘 운동 등 여성과 소수자의 활동은 더더욱 그렇다. 페미당당의 구성원들은 페미니스트 운동/예술가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흐릿한 계보 속에서 스스로의 족적을 치열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꼭 진행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지난 5년간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역사를 쓰는 “페미당당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처음으로 부딪친 난관은 기록의 부재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기억 속에서 무엇을 기록으로 남기고, 남기지 않을까를 결정하는 일이 당면과제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아카이빙의 제1 목표를 페미당당의 활동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적어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단선적, 권위적, 남성 중심적인 기록의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만큼, 우리의 기록마저 기존에 보고 배웠던 역사 기록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었다.

따라서 프로젝트는 그 출발과 동시에 이와 같은 질문에 마주하게 되었다: 페미당당의 활동 중 어떤 것을 기록할 것인가? 어떤 매체를 통해 남겨진 기록을 모을 것인가? 활동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서로 다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활동을 기획하거나 이에 참여한 개인의 이름을 전면에 기록할 것인가? 혹은 기록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에 가까이 가기 위해 “페미당당 아카이브 프로젝트”는 다원적이며 민주적이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역사를 쓰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기록의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 논쟁, 모순을 감추지 않고, 그 과정이 프로젝트 내내 첨예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과정을 설계했다.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는 “페미당당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결과를 현실 공간에 공개하는 의미를 가진 전시이다. 동시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문제를 최대한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함께 찾아가기를 요청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전시 제목은 페미당당의 이름에서 유래한 문장으로, 그동안 광장에서 가장 많이 외쳐온 구호이기도 하다. ‘페미당당’은 ‘당당한 페미니스트’라는 뜻과 더불어 ‘페미니스트 정당’을 꿈꾸는 의도를 담은 단체명으로, 2016년 당시 페미니즘적 의제를 내세우는 정당이 없다는 문제의식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2021년 오늘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이 등장한 지 오래고, 수많은 정치인이 페미니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한다. 동시에 기시감을 넘어 처음 느끼는 스산함이 들 정도로 혐오세력의 반격도 심해지고 있다. “페미”라는 정체성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여성 개인에 대한 압박과 위협이 강해지는 시기이다.

페미당당의 역사를 내보이는 전시 제목을 정하며, 서울 시내 한복판에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라는 대형 플랜카드가 내걸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5년 전 우리는 이 구호가 위협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라는, 온건하며 당연한 명제라고 생각했던 이 문장은 오늘날 사회에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파트 1.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우리가 직접 쓴다


2016년 겨울,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현장에서 페미당당은 혐오발언과 혐오문구가 거리낌 없이 등장하는 집회 모습에 반대하며 안전 공간인 “페미존”을 꾸렸다. “페미존”은 광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던 여성과 소수자에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목소리 낼 기회를 마련했다. 집회 무대에서 튀어나온 혐오발언에 대한 공식적 사과를 받아내거나, 여성혐오적 노래를 부르기로 예정된 가수의 공연에 반대하여 취소하게 하는 등 집회 전반적으로도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다음 해 서점에서 퇴진 운동에 대해 기록한 두꺼운 책을 발견하고 든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촛불집회에 대한 서술 어디에도 페미존에 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광장에 나서는 여성과 소수자는 혐오와 추행을 비롯한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야 했으며,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공동체가 있었음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촛불 1주년”을 기억하는 집회에서는 또다시 자리를 찾지 못하는 느낌이었으며, 집회를 회고하는 내용을 담은 특집 기사 인터뷰에는 우리의 말이 편집되어 나갔다.

광장에서 우리는 늘 역사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확신은 활동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활자로 박힌 “역사”로부터 소외된 광경을 마주하니, 가만히만 있어서는 존재가 지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투쟁에 대해서는 스스로 기록해 세상에 들이밀어야 하겠다는, 또 한 번의 투쟁에 대해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

파트 2.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의 역사


동시대 여성들은 “크래딧 챙기기”에 민감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직적 조직 구조나 강요된 겸손 때문에 자신이 한 일에 이름을 확실히 얹지 못 할 경우를 경계하라는 조언을 우리도 수차례 들었다.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가 뚜렷하게 기록되지 못한 데에는 여성이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내세우지 않게 만드는 사회적 압력도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페미당당은 활동 과정 내내 최대한 많이, 적극적으로 이름과 얼굴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노력했다. 시위에 나가면 꼭 단체 사진을 찍었고, 언론 인터뷰를 할 때는 익명이 아니라 실명이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소셜 미디어에 활동 내역을 올릴 때도 웬만하면 얼굴이 드러나게 했고, 각자의 이름을 쓸 수 있는 경우에는 적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이처럼 개인을 열심히 기록하는 일이 단체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페미당당 구성원 중에 더 많이 드러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페미당당은 대표 없는 친구들 간의 느슨한 모임으로 결성되고 운영되었다. 하지만 시간이나 상황적 역량의 차이는 물론 서로 다른 성격 등을 이유로도 누군가는 다른 친구들보다 활동에 더 많고 적게 품을 들이게 되었다. 또한, 직장의 문제 등으로 페미니스트인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그 결과 많이 일하는 사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 구성원들과 더 친한 사람이 더 많은 발언권을 가져가는 권력의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대표 없는 단체라는 점이 무색하게 누군가의 얼굴이 페미당당을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문제는 페미당당의 시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다. 모두 페미당당의 역사에 동일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서로를 설득했지만, 분명 누군가는 자신의 흔적을 더 많이, 자주 기록 속에 노출했다. 따라서 우리는 페미당당의 역사를 쓰는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무엇을 어떻게 역사로 기록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오랜 시간 토론했다.

기록하기/기록하지 않기를 구분하기 위한 수많은 논쟁을 통해, 이번 전시회에서 공개할 기억과 자료를 선별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1. 페미당당이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스스로 기획하거나 활동에 참여한 내역을 기록한다.

2. 활동마다 더 시간을 내어, 전면에서 활동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

페미당당은 단순히 활동을 위해 모인 단체가 아니다. 함께 대화하고 식탁을 차리고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 간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단체 내부로부터 갈등이 생기는 일을 막거나 개인의 상처를 함부로 봉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페미당당이라는 단체의 구성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공동체에 온전히 속해 있다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개인의 역사를 약간 희미하게 하더라도 공동체로서의 기억을 존중하자는 기획 의도는 프로젝트 연계 워크숍인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명확하게 나타난다. 해당 워크숍은 김영주 작가의 “플레이풀케어 워크숍”에서 “DocGame” 형식을 가져와 진행한 것으로, 개인이 구글 독스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어 하나의 질문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띄고 있다. 워크샵은 항상 “각자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만큼만 이야기합니다”, “각자에게 모순적인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존중합니다” 등의 원칙을 약속한 후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페미당당 내부의 소외를 피하고자 개인의 이름을 페미당당이라는 단체명으로 대체하는 시도를 진행하다 보니, 오히려 페미당당이라는 단체의 배타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페미당당의 활동은 예술작업이기도 하지만 또 사회운동으로서, 참여자, 연대자, 심지어 이를 목격한 익명의 시민들이 있기에 비로소 완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활동의 주체를 단지 "페미당당"으로 적는 것은, 페미당당의 안과 밖의 경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기록되지 않는 이들의 입지를 더욱 불안정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고루한 역사 기록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우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한 가지 원칙을 더 세우게 되었다.

3. 페미당당 활동 과정에 함께한 동료 시민들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노력한다. 

“페미(  )당당”은 이와 같은 원칙에 답변하는 의미의 작품이다.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전시를 관람하며 지난 5년에 대한 기억을 상기한 관람객은 마지막으로 “페미(  )당당”을 마주하게 된다. “페미(  )당당”은 수많은 참여자의 기억을 역사의 순간에 직접 표시(marking)함으로써 완성되는 관객 참여형 작품으로, 익명의 자아가 공동체의 모습으로 표출되는 장면을 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