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6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북토크: 우울증과 함께 살기 혹은

  우울증과 함께 살기 혹은    저는 스스로를 10년 차가 되어가는 모범적인 우울증 환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범적인”이라는 부분입니다. 저는 병원에 지각이나 결석을 할지언정 어쨌든 약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가고, 약도 7일 아침 저녁 해서 14칸이 나눠져있는 약통에 매주마다 잘 소분하여 꾸준히 먹습니다. 상담을 시작한지도 벌써 2년이 넘어가고, 최근에는 글쎼,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한약까지 먹게 되었습니다.  (한의원에도 분과가 있고, 한방신경정신과가 있더라고요)  미나가 “미괴오똑”을 쓰던 당시 저는 제 정신병을, 아니 정신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를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을 꽤 좋아하던 상태였습니다. “내 우울증 너무 좋고 멋져! 간지나!” 이런 느낌은 아니었고요. 다만 옛날 긴 항해를 하던 선원들이 다들 괴혈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자주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건 어떤 바다의 저주같은 것에 의해 걸린 병이 아니라 단순히 비타민 C 부족에 의한 증상이었지요.   그 시대 선원들이 배를 타면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먹을 수 없으니 당연하게 괴혈병에 걸리듯이, 나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녀로서 미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치료해주는 정신과 약은 그저 비타민제 같은 것이라고 여겼어요. 잇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작은 약. 매일매일,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먹어도 괜찮지 않나 싶었습니다.  요즘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간단하게는 시간이 더 지나서 병원에 가고 약을 먹는 일에 약간 더 지치기도 했습니다만. 치료나 치유같은 개념에 대해 다시 고려해볼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과학적으로’ ‘잘못된 것’을 ‘바꿔야’ 한다는 개념이 얼마나 해로울 수 있으며 또 자주 틀리는지는 미나에게 자주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 1-2년간 페미니즘 철학, 몸 철학, 신유물론을 익히거나, 일라이 클레어의 글과 같이, 치료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이야기들을 더 많이 접할 수 있었어요.  정신병 산업 체

20240929 "해일 앞에서" GV

페미당당 활동을 다룬 전성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해일 앞에서"(2019)에 대한 GV(네덜란드 예술공간 Extrapool 주최)에서의 구두 문답 한역본   1.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페미당당은 공동체로서 활동을 쉬겠다고 결정한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또한 낙태죄 폐지 운동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낙태죄가 폐지된지 5년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 정부와 국회는 새로운 관련 법안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 심지어 임신중지 약인 미프진조차 아직 한국에 수입되지 못한다. 한국에서 낙태는 더이상 불법이 아니지만, 또 합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의료보험 체계를 가진 나라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여전히 낙태는 보험 처리 없이, 개인의 경제적 부담 하에 다소 은밀하게 진행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 사실 내 삶은 꽤 달라졌다. 나는 거의 매주 “어느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달라”는 다이렉트 메시지를 받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대형 프랜차이즈 산부인과들에서 비교적 쉽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 (물론 역시 비밀스럽고 때때로 위험하기는 하지만)     또 중요한 부분이 있다. 낙태죄가 폐지되던 날 밤, 나는 몇몇 친구들의 전화를 받았다. “사실 몇 년 전 낙태했는데, 당시 남자친구가 그 사실을 안다. 혹시 그가 신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이제는 마음이 편해졌다, 고맙다.”   페미당당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떤 의미로든 함께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그렇기를 소원한다. 어떤 친구들은 단체를 탈퇴하거나 서로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페미당당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딥페이크 성범죄에 대응하는 시위에 나갔다) 나 개인적으로는 모든 친구들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2. 한국 정부와 사회는 구조적인 성차별을 단순히 개인

20240424 산문 낭독: 불교와 섹슈얼리티: 살이 문드러지고 썩어 없어져야만

  살이 문드러지고 썩어 없어져야만   부처는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속세를 떠나 머리를 깎고 맨발로 걸으며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생이 고통이라 합니다. 이 고통을 끝내는 것이 수행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고통은 왜 생기냐? 잘못된 집착 때문에 생깁니다. 다들 눈을 감고 나는 무엇에 집착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무엇에 집착하고 계세요? (청중에게 질문) 부와 명예, 혹은 가족이나 우정 혹은 건강… 무엇이든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비로소 깨달음을 얻고, 괴로운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의 제자들은 무엇에 가장 집착했을까요?   아마 여자였나 봅니다.   육욕, 혹은 색욕이라고 고상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냥 여자랑 자고 싶어서 괴로움에 몸부림 치던 제자들을 위해 부처는 제안했습니다. 그럼 이런 수행법을 써보면 어떻니.     부처는 제자들을 공동묘지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공동묘지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인도에선 갠지스강 옆에서 시신을 태운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으시죠. 이 화장 문화는 고대부터 이미 정착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에 어떻게 인간을 뼛가루가 되도록 활활 태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 시대의 공동묘지는 말이 묘지지, 사실 시체가 널린 터에 가까웠습니다.     공동묘지에 간 제자들은 시체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 시체를 골라라. 부처는 지시했습니다. 앞에 앉아라. 시체가 완전히 썩어 없어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아라.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부처가 지시한 수행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엄격한 관찰 방법과 단계 구분이 있었습니다. 관찰해야 할 부위는 머리털, 몸털부터 침, 콧물, 관절활액, 오줌에 이르기까지 32개, 시체의 부패 단계는 9가지에 달했습니다.     혹 지금 이 자리에도 지나친 성욕으로 괴로움에 시달리고 계신 분이 있나요